|
김 씨 아저씨네 집 뒤편에 있는 감나무로부터, 1학년부터 6학년까지가 모조리 한 반인 분교 운동장 끝까지가 알고 있던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둥지처럼 아늑하고 성처럼 견고한 이 한 뼘의 세계에는 산수를 잘 했던 환이, 코가 누랬던 덕이, 구멍가게에서 쫀득이를 씹던 영철이, 비듬이 많았던 국이, 늘 한 웅큼의 딱지를 들고 논두렁에서 나를 기다리던 연이, 서울 말씨를 예쁘게 쓰던 순이가 살았다. 별 볼 일 없고 별 일도 없는 이 녀석들은 늘 특별한 일을 기다리는 양, 오후 때만 되면 산자락에 걸린 도로의 소실점을 바라보았다. 빨간 모자를 쓰고 이 세계 바깥으로부터 달려 오는 우체부 아저씨. 투닥투닥 우는 스쿠터, 그 뒤꽁무니에서 우렁차게 내뿜는 답답한 회색 연기를 우리는 가슴 졸이며 동경했었다.
순이가 스쿠터가 달려오던 세계의 저 편으로 간다고 했을 때, 우리는 직장을 옮기시는 순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그래서 하얀 얼굴에 원피스가 어울리는 순이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의 인간들이 세계의 끝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을 걱정하듯이, 우리는 세계의 밖으로 나가는 순이가 그 괴물에게 잡아 먹혀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될까 걱정했다. 순이네 가족은 파란 색 용달차를 타고 떠났고 우리는 논두렁 끝까지 콧물과 눈물 범벅이 된 채 그 뒤를 쫓았다. 숨이 가빠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던 그 지점에 어떤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지나기 위해서 어떤 통행료를 내야 하는지 꼬맹이들은 알지 못했다. 또 알 수도 없었다.
덕이 아버지, 국이 아버지, 덕이 아버지가 다니던 탄광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광이 돼버리고, 익숙하던 얼굴들은 하나 둘 세계의 바깥으로 떠나갔다. 어른들은 술자리가 잦았었다. '니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아부지들처럼 안 살아야재'라고 아저씨들은 말했고. 덕이 아버지가 농약을 드셨다는 흉흉한 이야기도 떠돌았다. 또 다른 세상의 문으로 가는 통행료는 이 벽촌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과중했는지 모른다.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나는 점차 탄광에 도시락을 싸가며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의 시커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서울 사람이 돼갔다. 그 세계는 점점 내게 까마득해져 갔다.
두 세계를 분리해주는 이 견고한 문 덕에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덕이네는 우리 옆의 옆집에 살았었다. 아직도 이 문을 건너 오지 못하고 거기 살고 있다. 그저 그 뿐이다. ![]() p.s.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N.EX.T의 "The World"라는 앨범에 실린 "세계의 문 part 1: 유년의 끝"이라는 곡을 듣고 떠오른 생각들을 가상의 인물이 쓴 수필 형태로 써본 것이다. 나이가 먹고 성공한다는 게 결국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배반하면서 보다 힘있고, 보다 강한 세계를 쫒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명박 같은 가난한 계급 출신의 지도자들이 외려 부자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걸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배반해가면서 그 자리에까지 간 것일테니 말이다. 시골 방파제에 앉아 새총을 같이 쏘던 꼬맹이들. 여자아이 치마를 들추고 고무줄을 끊다 혼도 많이 났던 개구장이들. 방송반에서 같이 빵을 나눠먹던 친구들. 뜨거운 가슴으로 책을 읽고 설익은 담론을 이야기하던 소모임의 동료들. 또 인턴 기간 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때의 나를 아는 그들은 내가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혹시 그들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변혁을 꿈꾸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물론 이들의 말대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했다. 그리고 과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방법론들은 폐기되거나 재고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세상을 변혁하려는 모든 시도의 폐기를 의미하는가? 이들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미래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때부터 '뉴-라이트'는 새로운 이념적 운동이 아니라 위기의 우파를 위한 '정치적 캠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맑스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우파가 냉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적(敵)'을 한번도 업데이트하지 않는 동안, 오히려 68년 혁명 이후의 좌파들은 '맑스'를 읽는 다양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동구권의 붕괴를 비롯한 일련의 위기들과 휘몰아치는 세계화의 논리에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오늘의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고자 했다. 국내에서도 그런 작업들은 활발하게 계속되어 왔는데, 지금부터 소개할 이진경은 현대 사유를 통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를 통해 현대 사유를 새로이 해석해 온 저작들로 오래 전부터 주목받아온 학자이다. 외부를 통한 사유의 가능성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껏 만나온 '사유'란 외부의 조건들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자신의 내적 성질이나 보편적 양상으로 서술해왔고, 어떤 외부의 조건과도 무관한 보편적 진리를 자신이 설파하고 있는 듯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학문이라는 말로 다른 앎들을 억압하는 '보편성'의 시도와 체계적이고 위계화하는 '내부성'의 논리에 강한 반감을 보여왔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외부를 통한 사유'로 정의하고 여러 저작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열어왔다. 내부성의 형이상학과 관념론이 삶이나 사물, 사건 등을 관념의 내부에 쑤셔넣어 결과적으로는 '외부'를 말살하는데 집중한다면, 그가 주장하는 '외부성의 유물론'은 내적인 보편성의 형식조차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과 권력이 작동하는 '배치'를 통해 의문에 부치려 할 것이다. 관념론에 오직 '이성의 목적'이라는 '내부'로의 한가지 방향만이 있다면, 유물론에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방하는 '외부'의 모든 방향으로의 열린 길이 있다. 그러므로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 책의 부제를 '자본과 그 외부'로 삼아도 좋겠다고 밝힌 그에게서 <자본>을 요약하고, 그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주석서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보편타당한 과학으로 설명하고, 정치 경제학이 어떤 외부도 포괄할 수 있는 철의 법칙임을 주장하는 소위 '정통' 좌파들의 작업 방식에 해당될 텐데, 그런 작업방식과 그가 그리는 사유의 선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궤적을 그릴 것이기에. 정치경제학적 법칙들과 유명한 명제들을 쉽게 풀어놓은 이 책을 통해 중요한 고전임에는 분명한 맑스의 <자본>을 나름대로 요약, 정리해 두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을 활용하는 가장 재미없는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이 책을 차라리 '변혁을 꿈꾸기 위한 도구', '변혁을 기획하기 위한 기계'로 활용하길 바랄 것이다. '외부'를 통해 다시 읽어낸 <자본> 일견 <자본>은 자본의 발생과 가치론 등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자본>이 정치경제학의 법칙들을 완성하고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 그것을 끝까지 밀어부쳐 그들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드러내고, 결국 근본으로부터 전제들을 붕괴시키는 '외부'를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둔 책으로 해석한다. <자본>은 근면과 성실을 통해 자수성가한 자본가의 신화를 계보학적으로 탐색해 그 안에서 자본의 역사가 본원적으로 수탈의 역사임을 밝히는가 하면, 화폐의 발생이 시장이 아닌 국가의 초월적 힘을 통해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없는 가치 증식이 가능해진 기계적 잉여가치의 시대에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 가치론이 허구임도 보여준다. 따라서 얼핏 가치법칙과 관련이 없어보이는 기술과 기계의 발전들도 자본의 계급투쟁 전략임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끊임없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법칙에 잡히지 않는 '외부'가 모든 법칙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를 통해 이진경은 '외부적 조건'으로부터 무관한 자본의 법칙은 없으며, 그 법칙들은 '외부'의 처절한 계급투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오늘과 대화하는 새로운 사적 유물론의 가능성을 이책에서 기대한다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책의 '활자적 물질성'과 그 안의 서술을 신성화하기 보다, <자본>이 쓰여졌던 상황과 다른 '외부적 조건'과 함께 사유하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만 <자본>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변혁의 가능성을 제한당한 <자본>을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조건으로 다시 읽어내고, 각자의 창조적인 욕망의 흐름을 통해 가능성의 뇌관을 복구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자본의 생산과 계급투쟁의 전략이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TV와 인터넷 등 생활의 곳곳에 침투한 시대에, 그리하여 사회의 전 영역에 잉여가치의 수취가 확대된 지금, 더 이상 변혁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이라는 식의 대응을 통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광고시청이나 인터넷 배너처럼 대중들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모든 부분에 자본의 지불을 요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안은 더 이상 가치의 생산을 자본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욕망을 통해 조직화하고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자본의 모든 법칙에 '외부'가 있음을 안 이상, 자본주의의 공리계에도 '외부'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므로. 변혁을 꿈꾸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권력에게 포획되지 않은 욕망을 통해 그 '외부'를 가시화하고 현재화하는 것, 아마 그것은 <자본>만을 읽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고 여성과 소수자, 생태학적 관심 등의 다른 가능성들과 연대함으로서 보다 풍부해질 것이다. 그를 통해 아마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이미 와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리라. 그리하여 '새로움(New-Right?)'을 가장해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처음부터 '낡았음(Old-Right!)'을 깨닫고 비웃게 되리라. 다시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의미는 한번에 현전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기"된다. 의미를 확정하려는 보편성의 시도를 비웃으며 오늘도 기존의 의미를 뒤집는 반역적이고 발칙한 읽기는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작업만이 '새로울' 수 있음을 잘 안다. 그 끊임없는 '새로움'이 말해주듯 '변혁'을 꿈꾸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세상의 반'이 생각하고 말해온 것들의 역사 마리트 룰만 외, <여성 철학자>
오해하진 말자. 이 책이 '번역물'이라는 건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부차적인 저작'이라는 뜻이 아니니까. 오히려 발터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라는 글에서 좋은 번역을 "원본을 완성시키는 미메시스"라고 불렀다. 그는 "예술이 자연의 말없는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듯, "번역은 원본에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원본에서) 언어화되지 못한 것을 언어화시키는 행위"이며 "원작이 불충분하게 제시한 것을 '보완'하고 '완성'하며 '표현'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번역'이라면, 벤야민적인 의미에서 '번역'이라면,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들의 관심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보완'하고, 남성들만이 참여했던 반쪽짜리 철학사를 '완성'하며, 더 나아가 억압받았던 여성의 이야기를 '표현'해내는가. 세상의 반이 생각하고 말해온 것들 책의 서문에서부터 대표저자 마리트 룰만은 "철학사에서 여성이 이룬 성취들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고의적으로 망각되어 왔다"며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아스파시아가 원조였으며, 앤 콘웨이라는 여성이 라이프니쯔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이었다는 사실, 또 아빌라의 테레사가 몽테뉴보다 먼저 수상록을 썼다는 사실 등은 우리가 아는 철학사에서는 한번도 만나볼 수 없는 충격적인 것들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한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여성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탐색하며 '승리자'인 남성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저술을 말살하거나 남성의 것으로 바꿔버리려고 갖은 노력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또한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들이 어떻게 이들의 본래 모습에 접근하는데 장애가 돼왔었는지도 보여준다. 그러나 또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인 저작이지만 여성'주의' 철학자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별다른 비판 없이 나열한다. 예컨대 이 책에서 제법 비중을 두고 다뤄지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생물학적인 여성이었지만 계급투쟁 밖의 성차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학자였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는 고대와 중세에 이르는 철학자들 중 대부분은 아직 '여성'이라는 문제의식의 맹아 정도 밖에(혹은 그조차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잊히고 업적을 도둑맞아야 했다. 따라서 이들을 다루는 것을 정치적인 비겁함이나 무책임함의 소산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 여성들은 당대의 상황에서 단지 사유하고 말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내용에 상관없이 삶을 담보로 한 모험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당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 여성 철학자의 이야기는 떨어질 수 없다. 이 책이 여성 철학자의 사상 이외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성 철학사'가 아니라 '여성 철학자'인 이유 연대기적으로 여성 철학자들을 배치하고 있으면서도 이 책은 한사코 '여성 철학사'라는 제목을 피했다. 여기에는 기존의 '철학사' 개념에 대한 거부가 배경에 깔려 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오랫동안 '보편'을 해명하는 데 주력했고, 또 '철학사'라는 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향해가는 과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보편'이라는 것은 '남성'들의 시각일 뿐이었다. 이미 푸코나 데리다 같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지식이란 권력일 뿐"이라거나 "로고스, 남근 중심주의"라는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여성 철학자>들의 저자들은 '철학사'라는 제목을 통해 이 책이 또 다른 '보편사'로 받아들여지는 걸 피하려 했을 것이다. 이 책은 '번역'의 과제에 충실하면서도 완성된 '번역물'이 되길 거부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번역'의 끝나지 않는 과정에 참여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확인하는 것은 '확고부동한 여성 철학의 의의'가 아니다. 이 많은 여성철학자들을 한 가지 흐름에 엮을 만한 또 다른 '보편', 이를테면 '여성 철학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여성 철학자'들'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균열들을 발생해내며 계속해서 '고정된' 의미들을 이탈한다. 이 책 곳곳에서 확인되는 것은 '보편'이 결정 불가능하며, 허구라는 사실이다. '철학사'라는 단일한 흐름이나 '차이'를 외면하는 총체성은 재건될 수 없다. 이들에게는 항상 돌아가야 할 진리(남근)가 없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여성'이라는 알려지지 않았던 철학의 지평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하나 더 제기할 수 있다. 타자화되고 배제되어 밀려났던 이야기들이 '여성 철학자들'에 관한 것뿐일까? "이 책이 서양 여성 철학자들만 다루기 때문에 '미완'의 저작이다"라는 건 차라리 사소한 비판이다. 동양의 철학, 흑인의 철학, 소수 민족의 철학, 게이들의 철학,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지평들은 무수히 많다. 이 지평을 가시화하는 것이 아마 '번역의 과제'일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번역'은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해가며 '표현'해내겠지만 저자들은 제목을 지을 때부터 '번역'이 완수될 수 없음을, 완결된 '철학사'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시대를 넘어서 욕망한 화가들과 철학자들의 만남
니체에게 있어 '르네상스'는 단지 과거의 예술 운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니체는 "그것이 나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적 세계에 대한 준열한 공격'으로 르네상스를 정의했다. 니체는 근대 철학의 가치를 전복하는 자신의 작업과 르네상스를 동일시한 것이다. 니체로부터 예술은 사유의 문제가 됐다. 철학은 더 이상 관념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부터 헤겔에 이르는 근대의 철학은 확고한 이성으로 불변의 진리를 완성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유에 이르면 철학은 관념의 절대성에 만족하는 대신 끊임없이 그를 상대화하고 감각의 세계로 비약해간다. 더 이상 '예술'이라는 감각 세계의 문제와 철학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생의 모순적인 상황에 직접 대면한 화가들과 철학자들 시대를 넘어서 생의 '극한'과 대결하는 예술가들은 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에게 발상의 출발점으로 기능했다. 철학자들과 시대를 넘어서 욕망했던 화가들의 '마주침'. 사카이 다케시의 <니체의 눈으로 다 빈치를 읽다>는 예술과 철학의 접점에 대한 책이다. 생의 극한적인 자기모순에 대면해 자신의 틀을 파괴하면서까지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화가와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그려보려 했던 것이다. 천사에게 발기한 남성의 성기를 그려 넣는다거나, 그리스도교의 성자인 세례자 요한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이미지로 그린다거나 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들은 파격적이다. 다 빈치는 니체에게 '선과 악을 포괄하는 지평'으로 다가왔다. 신에 의지해 삶을 '정체'시키는 것은 니체에게는 '데카당스(퇴폐주의)'나 다름없었다. '선악의 피안'을 주창했던 니체는 선도 악도 아닌 '흐름'의 삶을 추구했으며 그렇게 유희하는 삶을 통해 근대의 여명기를 표류했던 다 빈치의 핵심에 근접했다. 그러나 저자는 니체처럼 감각과 관념의 위계를 단순히 전복하는 것은 또 다른 일신교주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사카이 다케시는 니체뿐만 아니라 아르토의 고흐론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고흐의 광기를 찬양하고 근대 사회와 정신 병리학을 최저의 가치로 폄하하는 것에 대해 '단순하고 일방적인 가치관의 전환'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고흐의 그림은 서구의 자기 비판과 해체라는 모티프도 중요하지만 사랑에 의한 평온한 결합을 추구했던 의지도 중요하다고 말한다(고흐의 생애가 자살로 마감함으로써 그 의지는 끝내 비통하게 좌절했지만). 저자는 선악의 가치 구도를 단순히 뒤집는 것을 넘어 상이한 욕망들과 상이한 영역들이 대결하는 생의 '모순'적인 상황에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의 전제정에 대항하면서 또 다른 것의 전제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한다. 바타이유의 '다르게 되는 것' : 현대의 '존재론' '삶의 모순'이라는 바탕에서 '한계를 향한 욕구'야 말로 이 책의 전반을 추동하는 모티프다. 홀바인과 프로이트, 고야와 바타유, 고흐와 푸코, 칸딘스키와 코제브, 톰블리와 바르트. 이 책이 다루는 화가와 철학자들은 미술사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양식의 변천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형식에 대한 집착도, 꼭 다루어야 하는 내용에 대한 집착도 없다. '한계'와 '모순'에 부딪쳐 시대를 넘어 욕망하는 삶을 실천한 화가와 철학자들만이 오로지 저자에게는 중요하다. 홀바인은 3차원을 2차원에 옮기는 회화의 폭력을 감지하고, 공간에 가해진 살해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대사들>에다 일그러진 해골상을 그려 넣었다. 고야는 에스파냐 민중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데서 평가 받는다. 중심의 상실 위에서 주변의 긴박하고 투명한 유희를 묘사했던 칸딘스키. '가벼움'을 통해서 지적인 선도형 예술을 비판하고 생명의 가벼움과 풍요를 드러낸 톰블리. 모두 누가 더 중요하다고 할 것 없이 현대 사유의 어떤 주요한 '계기'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단순히 그림과 현대 철학에 대한 교양서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책은 흔히 비슷한 종류의 책이 그렇듯이 미술사나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요약 정리로 끝맺지 않는다. 책은 이제까지 해온 이야기를 요약하는 대신에 바타유의 '타자'에 대한 욕구, "다르게 되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으로 끝을 맺는다. 교양서로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근대 사회의 물화된 타성을 비판하는 현대의 '존재론'으로 읽혀질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를 고민할 차례다. '시민사회'의 한국적 맥락
이제 '시민사회'는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개념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90년대 중반부터 한동안은 '시민사회의 전성기'라 불러도 무방한 시기였다. '참여연대'나 '경실련' 등의 시민단체들이 시민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지지를 구축했고 <오마이뉴스>를 위시한 시민참여형태의 저널리즘이 기성언론 못지않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한국사회 진보의 주체가 '민중'에서 '시민'으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시민사회'의 부상은 돋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운동의 동학으로 '시민사회'론을 추켜세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 시민사회 내에는 진보적이지 않은 세력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민사회'를 언급하는 사람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나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나 대안으로써 '시민사회'를 언급한다. 이는 아직까지도 '시민사회'에 대한 명확한 개념규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기도 하다. 거품이 걷히면서 '시민사회'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시민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과정이자 목표"
저자는 서로 통일될 수 없는 이념들과 애매한 정치적 수사로 점철된 '시민사회' 개념을 구출하기 위해 기존의 논의를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대별한다. ▲토크빌, 푸트남으로부터 비롯된 '자발적 결사체'로서의 시민사회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홉스에 이르는 '좋은 사회'로서의 시민사회론 ▲하버마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합의와 토론의 '공공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론이 그것이다. 각각의 논의들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자발적 결사체론'부터 살펴보면, 이 논의는 신뢰와 협동에 바탕을 둔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체'가 안정된 민주주의의 토양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자발결사체는 국가의 중앙집중을 견제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자발결사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주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공통된 합의를 도출해내는 데 한계가 있다. 여기서부터 '좋은 사회'로서의 시민사회론은 자발적 결사체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사회가 이루어야 할 어떤 '문명화된' 가치로서 시민사회를 제시한다. 이 학파는 자칫 이기적인 이해의 주장으로 치닫기 쉬운 자발결사체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스스로 특권화를 경계하게 하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좋은 사회론' 역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이나 '어떤 것이 좋은 사회인가'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결여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공공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론'이 요청된다. '공공영역'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허물고, 실제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토론과 합의의 장이다. 저자는 시민사회 논의의 세 축 중에 어느 한 입장을 선택해 다른 입장을 비판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장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통합적 접근을 제시하고자 한다. 각 논의들은 단독으로는 모두 불충분한 설명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각 논의의 장점이 합해질 때 그것의 설득력과 실현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자발결사체'들은 신뢰와 협동이라는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자본을 구축한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좋은 사회'의 나아갈 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공영역'의 토론과 합의라는 민주적 방식을 통해 실현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각각의 시민사회 논의가 만나서 일종의 시너지 효과 같은 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저자도 이를 의식한 듯 시민사회에 대한 이런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서 '건강한 결사적 생태 체계'가 우선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의 참여를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우리는 상황에 맞는 결사적 삶의 형태를 끊임없이 창안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를 고민할 차례다 저자는 여러 세력들의 합의와 협력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협치(governance)'의 시대에 앞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이 보다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서구 선진국의 활동가인 저자의 논의를 바로 한국에 적용하기는 힘들겠지만 이제 '우리의 시민사회는 어떠한가'는 질문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자발적 결사'의 문화도 취약하고, '좋은 사회'에 대한 합의와 '공공영역'의 조정 과정도 전무한 한국적 맥락에서 에드워즈의 '시민사회'론은 그저 먼 곳의 이야기인 것은 아닌가? '시민사회'가 어떤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는 '이념'이길 바라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에드워즈의 <시민사회>는 여전히 불충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저자의 환경이 나아가야할 '좋은 사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진 선진국임에 반해, 한국의 시민사회는 아마 어떤 것이 '좋은 사회'인가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보수화 경향과 반동성에 대한 지적은 대개 옳다. 하지만 시민들을 계몽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강박이 시민사회를 자꾸 왜곡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제도정치에 대한 불신이 곧바로 시민사회에 대한 참여와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